오늘이 해병대 입대 44년이 되는 날!

보통 난 내가 언제 몇일 무었을 햇는지 대개 기억을 한다. 심지어 아무 필요가 없는것 조차도 때로는 말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당연히 기억을 한다. 오늘은 내가 1974년 1월7일에 해병대 입대했으니 44년이나 되었다. 따로 쓸것 없이 필자가 쓴 책 ‘잘하겠습니다’에서 발췌 상,하를 다 옮겨 놓을 생각이다. 많은 분들이 읽고 댓글을 달아서 SNS를 통해서 많이 전달되고 보고 읽고 군대가 아런 장점이 있구나, 해병대가 이렇게 강하게 사람을 만드는구나를 느꼈으면 해서 옮겨본다. 잘하겠습니다. 이채...234쪽 내인생 최고의 대학 해병대 "나는 여전히 성공에 목마르다" 금붕어출판사 에서는 207쪽 "안되면 될때까지 못하면 할때까지" 물론 다른 책에도 나와 있으니 참조 바란다. 약간은 수정하면서....

==============내용================

상)
“엄마, 3,000원만 주세요.” 1974년 1월 7일, 나는 동네 슈퍼마켓에라도 다녀오는 사람처럼 어머니가 건네준 3,000원을 들고 집을 나섰다.‘아무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해병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 해병대가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지금도 무슨 일이든 생각을 하면 행동에 바로 옮긴다. 아무리 ‘복잡다단한 문제’도 본질만 파악하면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어려움은 어려움대로,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밀어 붙이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쩜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나는 해병대를 지원입대했다. 266기, 해군·해병 통합 1기로 입대해서 입대 1주일 만인 1월 14일에 해병대가 됨을 선서했다. 전반기 8주 동안은 진해와 상남(현재 창원)에서 해병대 훈련을 받고 포항으로 배치돼 다시 4주간의 후반기 훈련을 받게 되었다. 결국은 석달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포항에서 훈련을 받던 중 목에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리하여 난생 처음으로 병원이란 곳에 입원을 했다. 포항 국군통합병원이 내 첫 번째 병원이었는데 거기서 3주간의 입원치료를 받았다. 당시의 군대가 대개 그랬지만 포항 국군통합병원은 정말이지 병원이라 할 수도 없었다. 병원 내에서 환자끼리 이른바 ‘빠따’를 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툭하면 누가 더 주먹이 센지를 가리는 결투가 벌어졌다. 훈련병이나 졸병들은 엄청난 ‘빠따’를 맞아야 했다. 나 역시 참으로 많이 혼이 났다. 훈련병으로 입원한 환자는 환자도 아니란 것이 이유였다.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을 텐데 그 시절의 군대는 항상 춥고 배고픈 곳이었지만.....

특히 동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한 추위는 정말이지 살을 에는 듯했다. 손등과 발등이 쩍쩍 갈라지는 것은 예사였다. 포항으로 배치된 우리 동기 400여 명 가운데 200명 이상이 동상 환자였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 해병대 생활을 우리는 빡빡 기면서 했다고 표현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 당시 해병대 이동용 사령관이 내 큰형님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동기여서 한 마디만 하면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가거나 포항에서도 더 좋은 보직을 얻을 수 있었으나, 나는 보병 생활을 감수했다. 옮겨 다니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거니와 형님에게 부탁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괜히 걱정을 끼치는 것이 싫어서였다. 무엇보다 스스로 고생을 원해서 지원 입대한 내가 편안함을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일담의 이야기는 고생을 너무 하는 동생이 안스러워서인지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부탁을 했단다. 대답은 간단했다 " 편하로 간것이 아니고.... " 그냥 두란다.

내가 해병이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가 뭐든 한 번 밀어 붙이기로 하면 불같이 덤비는 성격이 해병대에 딱 어울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한 번 가는 군대이므로 이왕이면 훈련이 쎄다는 곳에 가서 고생을 진탕해 보자는 모험 심리 때문이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는 것이 해병대 지원자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도 ‘설마 죽기야 하겠냐’라는 생각으로 죽기 살기로 매달릴 때가 있는데, 의외로 성공률이 아주 높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목표를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다. 사실 그 시절의 해병대는 머리에 먹물깨나 들었다는 사람들은 ‘개병대’라며 기피하는 곳이었다. 소대는 물론 중대 단위에서도 대학교 물을 먹은 사람이 귀한 때였으니 해병대가 얼마나 터프하고 힘이 드는 곳이었는지 알 만하다. 그러나 나의 선택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랑스러운 마음이 커져간다.

“연장이 없어도 뭐든 할 수 있다!”, “아파도 금방 일어날 수 있다! 아니, 절대 아플 수가 없다”, “성공은 시간 문제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 나만 못할 이유가 없다”, “안된다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이것들이 해병대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이다. 해병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CAN DO SPIRIT’, ‘안 되면 될 때까지, 못하면 할 때까지’라는 것이 그 유명한 해병대 정신이다. 해병대에 처음 입대할 때 배웠던 이 말을 나는 지금도 시간이 나면 중얼거릴때가 많다. “난 할 수 있다!” 이 말 만큼 자신감을 북돋워 주는 건 없기 때문이다. 해병대가 좋은 점은 또 있다. 그것은 해병 특유의 의리다. 해병대가 왜 유난히 잘 뭉치는 군대인가 하는 것은 학문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맨주먹으로 제세실업이란 회사를 창업하여 한때 한국 실업계를 풍미했던 해병대 선배 이장우 씨가 본인이 쓴 책에서 ‘인간도처 유해병’(人間到處 有海兵)이란 재미있는 말을 했다. 사실 인간 세상 도처에 육군도 있고 공군도 있고 해군도 있다. 그런데 인간 도처 ‘유육군’이나 ‘유공군’, ‘유해군’이라는 말은 별로 안 쓰는데 ‘유해병’이란 말은 많이 쓰고 있다. 그것은 해병대의 단결력이 그 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국 해병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 해병대나 영국 해병대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도 자신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 해병대 마크를 부착하고 다니거나 가지고 있는 수첩에 전화기에 노트에 심지어 집에 해병대 기를 꽂아 놓고 사는 사람은 해병대 출신밖에 없다. 그만큼 자신이 나온 군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